올해 초 이더리움 토큰 표준 ERC-20을 토대로 만든 토큰을 사려는 사람들이 급증하면서 지난 1월 중순 한때 이더(ETH) 가격은 1,400달러까지 치솟았다. 지금은 당시 암호화폐 열풍이 무색할 정도로 정반대의 상황이다. ICO 붐은 흐지부지됐고, 이더 가격은 200달러 언저리까지 폭락했다.
지난 12개월 사이 이더를 산 사람들은 모두 큰 손해를 본 상태인데, 바로 여기서 ICO 열풍과 뒤이은 가격 폭락과 이더 시장의 본질적인 연관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암호화폐 커뮤니티가 이번 실패를 실제 세계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현재 상황은 블록체인 플랫폼에 연동된 암호화폐 자산의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고 사라지는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이 역학관계는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더 같은 토큰의 가격과 실제 혹은 예상되는 네트워크 안에서의 효용(utility, 여기서는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연료”로서의 가치)의 상관관계가 그렇게 탄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설이 유력한 설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것은 나처럼 “팻 프로토콜 이론(fat protocol thesis, 애플리케이션 레이어가 아닌 프로토콜 레이어에서 가치가 결정된다는 이론)”을 처음부터 지지해온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일이다. 유니온스퀘어 벤처스(Union Square Ventures)의 파트너 알버트 벵거가 고안한 호소력 있는 이 이론은 유틸리티 토큰의 가격이 오르리라는 전망을 통해 오픈 액세스 소프트웨어 플랫폼 개발자들이 핵심 프로토콜을 무료로 개방하더라도 프로토콜 개발 작업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인터넷 패러다임에서는 SMTP와 HTTP 같은 오픈 액세스 프로토콜 개발자들은 (서비스를 무료로 쓸 수 있게 해야 하므로) 사용자들에게 사용료를 부과할 수 없고, 사용료를 부과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암호화폐 자산과 블록체인은 이러한 인터넷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토큰 가격이 곤두박질친 상황에서는 가치의 척도든 거래 수단이든 신용화폐로 매긴 값어치가 낮게 책정되니, 결국 토큰의 효용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핵심을 살펴보면 문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리샴의 법칙과 관련이 있다. 화폐나 토큰이 경제적 가치 교환의 수단으로서 커뮤니티 안에서 거래되려면 투자나 가치 저장 수단으로써 지나치게 매력적이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지속성과 희소성이 있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으며, 화폐를 발행하는 중앙 기관이 그 가치를 저하할 수 없어서 화폐가 투자나 가치 저장 수단으로 너무 매력적이다 보면 사람들은 화폐를 사용하는 대신 너도나도 쟁여놓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어느 정도 “나쁜” 돈이 커뮤니티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커뮤니티의 이익은 반드시 개인의 이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화폐가 거래되려면 가치 하락이나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예상되어야 한다. 커뮤니티에는 화폐를 쌓아두는 사람보다 이용하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
통화주의 경제학의 아버지인 밀턴 프리드만도 같은 주장을 했다. 매우 온건한 수준의 인플레이션 통화 확장이 예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는 화폐 가치 저하나 지나친 법정 화폐 권력의 남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성 최적화와 투자 전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다른 글에서 바로 이 점이 비트코인의 문제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이는 비단 호들러(HODLer, hold의 오타에서 시작되어 암호화폐에 투자해놓고 팔지 않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뿐 아니라 교환 수단으로서 비트코인이 현재 우위를 점하고 있는 법정 화폐에 도전할 수 있을지에 관한 더 근본적인 문제다. 비트코인은 희소성과 부패 방지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화폐다. 이는 비트코인이 거래 수단보다는 가치 저장 수단으로 더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코인 찬성론자들은 이 견해에 반박하며 화폐가 든든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써 자리를 잡고 나면 가치 교환 수단으로도 유용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가 옳은지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비트코인을 가치 저장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12월에 가치가 급락하기는 했지만, 지난 8년 동안 비트코인을 구매해서 지난해 가을까지 보유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투자 수익에 꽤 만족할 것이다. 반면 실제 무자본 거래는 아주 드물다. 라이트닝 같은 제2 레이어 솔루션 덕분에 거래는 더욱 편리해지겠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이 희소한 “좋은” 화폐가 광범위하게 거래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더를 보유하려는 수요가 생길까
이 모든 것이 이더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비제이 보야파티(Vijay Boyapati)가 트위터에 쓴 다소 자극적인 주장에 따르면 이더리움의 스마트 계약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결국 이더를 사용해 거래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이더리움의 “연료”라는 비유적인 이더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보야파티는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화폐를 보유할지 측정하는 동시에 화폐의 가격을 끌어올리는 핵심 동인이기도 한 “보유 수요”에 대치된다고 말했다.
작년에 잠깐 ICO 광풍이 불었을 때, 보야파티는 투자자들이 ERC-20을 바탕으로 만든 토큰을 사 모으기 위해 이더를 구매해 보유해야 했기 때문에 갑자기 이더의 보유 수요가 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토큰 판매 열풍은 이제 명백히 식었다. 스마트 계약을 이행하는 데 쓸 이더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구현하는 데 드는 달러가 필요해 ERC-20 토큰을 발행했던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보유한 이더리움 토큰 가격이 곤두박칠치는 상황에서 이를 팔아치우지 않으면 죽게 생겼다.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스텔라(Stellar)의 개발자이자 필자와 함께 MIT에 몸담았던 제레미 루빈(Jeremy Rubin)은 <테크크런치>에 쓴 기고문에서 이더리움 생태계의 여러 양상이 이더 가격을 0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빈이 말하고자 한 핵심은 결국 이더리움 상에서 토큰을 발행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스마트컨트랙트 네트워크가 이더의 “가스” 트랜잭션으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자체 토큰 거래에 의해 운영되는 모델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많은 사람이 루빈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낸 가운데 이더리움을 만든 비탈릭 부테린은 “관념적인 경제학”에 갇힌 글이라며 이 글을 일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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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준 경제학자 “암호화폐가 트리핀 딜레마 해결책 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직면한 대표적인 불균형 문제인 트리핀 딜레마(Triffin’s dilemma)를 푸는 데 암호화폐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세인트루이스 지사의 연구 부문을 이끄는 부회장인 경제학자 데이비드 안돌파토(David Andolfatto)는 지난 2일 온라인으로 진행한 질의응답 중에 암호화폐의 새로운 가능성을 언급했다.
트리핀 딜레마는 벌써 50년도 더 된 이론으로 전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를 발행하는 나라의 통화정책과 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 통화정책 사이의 불균형과 긴장 관계를 짚은 것으로, 기축통화인 달러를 세계 경제를 위해 충분히 발행하면 미국의 무역 적자가 늘어나고, 반대로 미국이 무역 흑자를 보면 달러가 전 세계에 충분히 풀리지 않아 국제 경제가 침체되는 역설을 뜻한다. 이는 미국이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무역 적자를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돌파토는 트리핀 딜레마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밖에도 암호화폐가 신용화폐로써 미국 달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연준이 암호화폐에 관한 통화정책을 시행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안돌파토는 위의 두 질문에 모두 부정적으로 답했다. 기본적으로 암호화폐는 민간에서 발행한 돈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달러의 발행과 거래를 굳이 탈중앙화된 합의 방식을 거쳐 분산원장에 기록해야 할 필요가 없으므로 달러가 암호화폐로 대체되는 일은 없으리라고 안돌파토는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안돌파토는 암호화폐 수요가 현재 기축통화의 수요를 대체할 만큼 높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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